삶이 예술이 되는 현대미술의 세계
현대미술은 대략 1950년대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술을 의미합니다.
일반들이 이해하는 ‘현대미술’은 독창적이다 못해 ‘난해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추상’ 이라는 명분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난해한 작품의 근거와 뿌리를 이해할 때 ‘진짜 현대미술’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듯 현대미술이 어느 예술 분야보다 다양하고 다채롭게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진’의 발전 입니다.
사진이 등장하면서 회화가 더 이상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임무를 맡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미술은 대상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리느냐의 문제에서 벗어나 ‘다른 생각’이나 조형미, 개념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현대미술에는 ‘거장’ 이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두 명의 ‘전설’이 있습니다.
바로 피카소와 마르셀 뒤샹 입니다.
특히 마르셀 뒤샹과 많은 예술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이것은 현대미술이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부흥하기 시작한 계기가 됩니다.
피카소는 1881년, 마르셀 뒤샹은 1887년생으로 두 사람은, 동시대에 살면서 1912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큐비즘 화가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큐비즘이란 ‘입체주의’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들어 ‘오역’이라는 주장이 많습니다.
‘입방체’ 인 ‘큐브’들을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큐비즘’이라고 비평한 것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입방체주의’가 맞습니다.
큐비즘의 대표 작품으로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과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 입니다.
피카소의 친구인 시인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브라크는 피카소의 화실을 방문하여 ‘아비뇽의 여인들’을 보고 자신이 추구하려는 새로운 회화의 길을 모색할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와 마르셀 뒤샹은 초반에는 잘 어울렸지만 이후엔 전혀 다른 행보를 걷게 되면서 둘은 서로를 배척하게 됩니다.
피카소는 뒤샹을 보고 ‘말로만 예술한다’ 라며 싫어했고 반대로, 뒤샹은 피카소를 ‘진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둘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관점과 시도로 20세기 현대미술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피카소 다른생각, Think different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르셀 뒤샹은 6남매 중 셋째 였는데 위로 두 형이 먼저 예술가로 데뷔를 했습니다.
그 후 자신도 예술을 하겠다고 하자 형들은 무시했고 이것은 뒤샹의 열등감이 되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1912년 화가로 승승장구 하던 뒤샹은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뒤 친구에게 “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 라고 말하며 회화와 결별하겠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뒤샹은 ‘계단을 내려 오는 누드 넘버 2’로 이미 뉴욕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뉴욕의 현대미술을 위해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독립예술가협회’를 설립했습니다.
기존의 보수적인 예술아카데미 전시 방식과는 달리,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전시회로써 참여하고 싶은 예술가는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뒤샹은 독립예술가협회가 민주주의와 ‘수용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수호하는지 시험해 보고자 했습니다.
1917년, 협회의 첫 전시회에 ‘R. Mutt (머트)’ 라는 가명을 적은 ‘뒤집어진 소변기’를 출품했습니다.
작품명은 ‘샘 (fountain 泉)’ 이고 마르셀 뒤샹의 대표 작품 입니다.
사람들은 당혹감과 혐오감이 뒤섞인 격렬한 반응을 보였고, 협회 이사 대다수는 장난질로 여겼습니다.
실제로 얼마 후 ‘샘’이 실종되었는데, 어떤이가 쓰레기인줄 알고 버렸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급기야 조직 위원회는 방침을 어기고 투표를 통해 ‘샘’을 전시하지 못하도록 하자, 뒤샹은 이에 항의하여 사임했습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인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응은 미술계의 권위와 사회적 통념에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뒤샹은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인 ‘The Blind Man’ 에 무명의 작가’R. Mutt’를 옹호하는 척 하며 이 작품에 대한 글을 투고했습니다.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고, 머트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논의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씨의 작품 ‘샘’도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뒤샹의 행보는 뜻하지 않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술과 예술가는 무엇인가?
- 예술가는 꼭 장인처럼 손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자기 아이디어에 맞는 사물을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가?
- 예술가에겐 손재주가 중요한가? 아니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가?
- 예술작품을 예술로 인증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인가? 미술관같은 예술기관인가?
공장의 대량생산품 중 하나인 그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배경지식을 뒤집음으로써 예술품으로써 승화시킨 것 입니다.
뒤샹은 자신이 고안해낸 이 새로운 예술방식을 ‘기성조각품’ 이라는 뜻으로 ‘레이메이드(Readymade)’라 명명했습니다.
한편, 1919년에는 ‘L.H.O.O.Q’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린 것입니다.
작품명을 프랑스어로 읽으면 ‘엘라쇼오뀌_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와 같은 발음의 문장이 됩니다.
앞서 ‘샘’이 산업사회의 기성품을 전혀 다른 예술적 맥락 안으로 끌어드리는 전략이었다면, 동음이의를 이용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은 이 작품은 이전 시대 예술작품을 현대예술의 전혀 다른 맥락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는 ‘발상의 전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뒤샹의 행보는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남깁니다.
1920~1930년대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 그는, 예술은 하지 않고 ‘체스에만 열중되어 있다’고 스스로 소문을 냅니다.
그 기간동안 그는 마르셀 뒤샹이 아닌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사회적 성역할’에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뒤샹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철학자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르셀 뒤샹은 정체성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