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작품에서 배우는 애플의 생각

애플은 왜 피카소를 광고 모델로 썼는가

1997년 미국의 애플사는 ‘다르게 생각하라 (Think different)’는 슬로건을 내걸며 대대적인 ‘광고’를 제작했습니다.

20세기 동안 종교, 과학, 예술 등 각 분야에서 애플의 슬로건과 일치하는 삶을 산 유명인들을 등장 시켰는데 아이슈타인, 에디슨, 간디 등이 대표적 입니다.

‘미술’ 분야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파블로 피카소,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치열한 공방 끝에 피카소가 선정 되었습니다.

이 피카소를 선정한 것은, 그가 남긴 명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그의 삶은 애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피카소의 생각이 애플사의 Think different 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몇 가지 작품을 소개해 드립니다.

[ 1997년 애플 광고 Think different 스티브 잡스 육성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

1. 첫 영성체 1895년

피카소가 공식적으로 출품한 첫 작품이며, 등장인물은 모두 가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영성체를 받는 여동생 롤라를 벅찬 감정으로 바라보는 남자아이가 바로, 피카소입니다.

신부의 모델이 된 남자는 미술 선생님이셨던 피카소의 아버지이며 왼쪽 상단에 어둡게 표현된 여자아이는 피카소의 또 다른 여동생인 ‘콘치타’ 입니다.

콘치타는 안타깝게도 7세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사망을 했는데, 피카소는 큰 충격을 받고 평생토록 괴로워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평가들은 ‘꺼진 양초’가 콘치타의 죽음을 상징하는 장치라고 주장합니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명작이라 일컫는 이유는, 무릎을 꿇고 영성체를 받는 아이의 흰 옷자락 묘사 등 기법의 완성도때문 만은 아닙니다.

피카소 그의 나이 15세에 ‘첫 영성체’를 주제로 담아낸 생각의 깊이가 사람들로 하여금 큰 찬사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의 시작은 ‘유아세례’인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신앙에 의해 신자로서 입적되지만, 첫 영성체는 처음으로 자의에 의해 크리스찬으로서 하느님께 헌신을 약속하는 첫 체험 입니다.

이렇게 피카소는 주체성이 강한 예술가였습니다.

2.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1912년

별개의 조각들을 붙여 모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비술 기법을 ‘꼴라쥬’라고 하는데, 바로 이 피카소의 작품이 세계최초의 ‘꼴라쥬’ 입니다.

종이에 정물을 그리고 장판 바닥을 뜯어 붙였으며 밧물로 테두리를 완성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은 언뜻보면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피카소는 어떤 회화든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근거없는 작가 마음대로의 추상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활용품을 화면에 붙이는 방식을 시도했을 정도로 작품의 이유,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회화란 무조건 캔버스안에서 그려서 해결해야 했던 시대에, 31세의 피카소는 세상에 없던 미술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3. 모자가 학생처럼 보이게 해주네요 1914년

피카소는 ‘어린 아이 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얼굴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의 뒤에는 무엇이 숨어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렇게 질문하고 질문해서 34세에 세상에 내놓은 작품 입니다.

이러한 그림 기법을 두고, 유치한 그림이라고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피카소의 미술 실력은 이미 10대에 입증되었습니다.

사진기의 등장 및 발전으로 ‘얼마나 똑같이 잘 그리는지’는 피카소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4. 우는 여인 그리고 ‘게르니카’ 1937년

‘우는 여인’의 주인공은 초현실주의 작가이면서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인 도라 마르입니다.

피카소가 57세에 그린 작품으로써 다음에 소개되는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통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입니다.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듯한 피카소의 특유한 기법이 잘 표현되었는데 기존의 원근법과 함께 현대사회에서 존재하는 고정된 미의식을 깨뜨렸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피카소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예술가 입니다.

피카소의 7대 대표작 중 하나 인 ‘게르니카’는 전쟁의 잔인한 파괴 그리고 인간의 수난과 비극을 담아낸 작품으로써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조국인 스페인의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의 명칭인데,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군이 이 지역일대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한 참상을 신문으로 접한 후 그린 작품입니다.

같은 해에 파리에서 열린 ‘만국세계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이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한 독일군 장교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당신이오?” 라고 질문하자 피카소가 “아니오. 당신들이 그린 그림이지” 라고 대꾸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품을 공개한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 정권 하의 스페인에서 전시할 수 없다며 반대했기 때문에 ‘뉴욕 현대 미술관’에 대여 형태로 전시되었습니다.

피카소가 92세까지 장수했지만 프랑코도 천수를 누리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피카소 생전에는 스페인에 전시되지 못했습니다.

5. 황소의 머리 1942

피카소가 어느날 피카소가 파리의 길거리를 걷다가 버려진 지 오래된 자전거를 발견하고 작업실로 가져가 분해했는데 갸름한 안장은 황소의 얼굴, 길고 구부러진 핸들은 황소의 뿔처럼 보였습니다.

피카소는 이 조형물에 ‘황소 머리’ 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우 흡족해 하며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보잘것 없는 쓰레기도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예술품의 재료다’

이렇게 창조적이면서 독창성이 돋보이는 예술 작품을 만든 그의 나이는 61세 였습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것을 ‘어떻게 보고, 여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드러나기도 하고 그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6. 황소 연작 1945

애플은 ‘애플 대학’이라 불리는 내부 훈련 기관이 있는데 바로 이 ‘황소’를 그려낸 석판 인쇄 11개가 애플이 기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초판에는 디테일을 제거하여 단순한 선으로만 이뤄져 있지만 여전히 황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 대상이 황소일 수 있는 가장 본질만을 남긴 것입니다.

피카소가 추구한 ‘본질의 핵심 가치’에 사활을 건 기업이 바로 애플 입니다.

리모콘 버튼은 단 3개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애플의 생각이 피카소와 일치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7. 빛 그림 (라이트 드로잉) 1949년

‘라이프’지의 사진기자 욘 밀리가 피카소의 집을 찾았습니다.

밀리는 피카소에게 스케이트 신발에 전등을 달고 빙판을 달리는 피겨 선수 사진을 보여주었고 그는 순간 번득이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집 안을 뒤져 손전동을 찾고 밀리의 카메라 셔터 막이 열렸다 닫히는 동안 피카소의 재빠른 손놀림은 허공을 누볐습니다.

미술과 사진의 훌륭한 콜라보 예술이 탄생한 순간 입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 붓 그리기’ 기법 입니다.

유원지에서 ‘스파클라 폭죽’으로 한번씩은 해봤을 ‘라이팅 드로잉’을 피카소는 70세의 나이에 세계 최초로 시도한 것입니다.

8. FACE NO.202 1963년

노년의 피카소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아져 미국, 유럽, 일본의 박물관과 개인 수집가들은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경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재력으로도 부강을 누렸데, 프랑스 남부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고 판화를 실험했습니다.

그의 나이 83세 때 입니다.

9. 자화상 1972년

피카소는 92세까지 산 장수한 예술가 입니다.

타계 1년 전인 91세에 ‘죽을 준비’가 안됐다며 유언장 쓰기를 거부했는데 심지어 ‘르부르 박물관’은 죽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가는 곳이라며 입점을 강하게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아직 그림을 더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자아 성찰을 위해 자화상을 그립니다.

피카소도 수십장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마지막으로 죽음에 맞서기 위해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가 죽은지 8년이 지난 후 1981년 ‘피카소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 소장 전시 될 수 있었습니다.

피카소의 생전 요청에 따라 프랑코 장군이 사망한 뒤의 일 입니다.

지금 소개해 드린 피카소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신다면 똑같은 기법으로 그린 작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늘 ‘다르게 생각’ 하며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밤 낮없이 노력했습니다.

창조자란 스스로 무엇을 할지 결정하며, 그것을 이끌어 가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입니다.

비판 철학의 창시자 임마누엘 칸트는 ‘천재’의 정의를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규칙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이런 의미에서 피카소는 단순한 화가, 예술가가 아닌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술가는 게으르고 불성실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연습벌레로 유명했던 피카소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지 않고 죽어도 되는 일만, 내일로 미뤄라’

그 결과 피카소는 하루 평균 7개의 작품을 만들어 평생 약 3만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상속 세법’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피카소가 사망한 후 유족들에게 부과된 막대한 상속세를 대신해서 현금 대신 작품으로도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이 ‘피카소 미술관’이 그의 조국인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에 있는 이유 입니다.

특히 피카소에게는 항상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시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너는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수도사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피카소가 되었다.」

[ 좋은 엄마의 경험 바로가기 ]

다음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공개한 ‘지니어스:파블로 피카소’ 60개의 영상 목차 링크 입니다.

[ 파블로 피카소 60개의 영상 목차 바로가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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