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의궤 박병선 박사 고귀한 업적

병인양요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던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10주년 특별 전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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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란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으로,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 입니다.

의례 절차와 내용, 소요 경비, 참가인원, 포상 내역 등 글자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항들을 그림으로 기록하여 후대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일을 추진하기 위해 제작된 것 입니다.

한마디로 ‘모범적인 전례’를 세우기 위함이었던 의궤는 ‘글씨와 그림’이 같이 있는 조선 유일의 기록물이며,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조선 22대 왕 정조 6년에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세우는데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양아닌 곳에 외규장각을 세운 이유는 ‘섬’인 강화도를 요해처(요새, 산성)라고 판단했기 때문 입니다.

이때 창덕궁 내 규장각에 보관해 왔던 어보, 교명, 어제, 어필 등 왕실 물품 등도 외규장각으로 옮겨지면서 일종의 ‘보물창고’였던 셈입니다.

정부에서 어떤 실태를 기록한 책을 ‘형지안’ 이라고 하는데, 현존하는 형지안 중 가장 마지막에 작성된 1857년 ‘강화부 외규장각 형지안’을 통해 5166점의 자료 목록이 확인됩니다.

이렇게 고귀한 뜻을 품은 외규장각이 1866년 프랑스 군에 의해 불타게 되는데 이것이 ‘병인양요’ 입니다.

병 : 세 번째를 뜻하는 ‘병’ (갑.을..정)

인 : 12간지 중 세 번째 동물인 ‘호랑이’를 뜻하는 ‘인’ (쥐, 소, 호랑이, 토끼…)

양 : 큰 바다, 서양 ‘양’

요 : 난리, 침략 ‘요’

즉, 1866년 ‘호랑이’ 해인 ‘병인년’에 일어난 사건 입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왕권 강화와 함께 외세를 배척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외세 배척 정책은,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지연 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흥선대원군의 뜻대로 해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백성들에게 ‘왕’이 아닌 ‘하느님’을 뜻을 가르치는 것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마침 신료들이 ‘천주교’에 대해 비판하자 흥선대원군은 ‘병인박해’를 거행하였으며, 이 일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죽었고, 백성 중 신도 9000여명이 죽었습니다.

이때 살아 남은 프랑스 선교인 3명 중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프랑스 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박해소식을 알려 보복원정을 촉구하여 ‘극동함대’를 끌고 강화도로 쳐들어 온 사건 입니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백성은 물론, 군인들도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손쉽게 강화도를 점령할 수 있었고 이후 프랑스는 서울 ‘한양’ 까지 올라갈 계획이었습니다.

조선은 ‘순무영’ 설치하였고, 특히 양헌수는 ‘기병작전’의 ‘어융방략’ 작전을 수립하여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정족산성’에 잠임에 성공한 양헌수 군대는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여 승첩을 거두었는데,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7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습니다.

이때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은궤가 든 상자 19점’과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의궤를 비롯한 340책의 서적 등을 약탈해 가면서 불까지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인해 외규장각에 남아있던 5000여책의 왕실의 중요 자료들이 소실되었습니다.

프랑스 사령관인 ‘로즈’ 제독은 약탈한 도서와 보물들을 목록으로 정리하여 보고서로 올렸으며 대부분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고 일부는 선물로 줬습니다.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 제2권 (1895년 간행)의 문서에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으며 약탈된 지 100여 년이 훨씬 지난 후의 일 입니다.

‘직지의 대모, 외규장각의 어머니인 故박병선 박사님’이 평생을 바친 조사와 연구의 업적 덕분입니다.

1972년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였는데, 어느날 중국 서가에서 먼지 더미에 파묻힌 고서 하나를 발견하고는 심장이 멎을 듯 했다고 합니다.

‘직지심체요절’ 이었는데, 불교 경전을 요약한 책 입니다.

그녀는 놀랍게도 직지의 구절 중 ‘쇠를 부어 만든 글자로 찍어 배포하였다.’는 구절과 1377년에 간행했다는 구절을 찾아냅니다.

당시까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정받았던 책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였는데 그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 입니다.

또한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 방법은 납으로 기름을 짜듯이 찍는 방법인데, 직지의 인쇄 방법은 현대의 인쇄 방법과 다르지 않는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당시 박병선 박사는 한국 인쇄술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중국, 일본의 인쇄술 관련 책자를 섭렵하고 프랑스의 대장간을 돌며 금속 활자 인쇄술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목판본과 금속활자판의 차이 등을 연구하는 등 직지가 세계 최초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라는 것을 그녀가 직접 실험을 통해 밝혀내어 ‘직지의 대모’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1972년 파리 고서전에서 ‘직지심체요절’을 발표했는데 ‘동양 여성’의 발언에 자존심이 상한 서구학자들은 말도 안된다며 무시를 했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박병선 박사는 국내 학계에서 더 충격적인 비난을 듣습니다.

‘여자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낼리 없어. 거짓말 하지마라’

이후 진행된 철저한 국제적 검증을 통해 1년 후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지 8년이 되었지만 ‘의궤’의 행방은 찾을 수 없어 애만 태우던 어느날, 도서관 동료의 한마디에 심장이 뛰었습니다.

“파손된 책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데 거기에 한자로 쓰인 책이 잔뜩 있더라.”

그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궁의 폐지 창고에서 ‘조선왕실의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고는 “감동이 밀려와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습니다.

매일 의궤를 연구하기 시작해서 1976년 한국 언론에 ‘외규장각 의궤’의 소재와 목록을 알렸는데, 이에 격분한 프랑스는 그녀를 ‘기밀유출’을 명목으로 해고 시킵니다.

하지만 박병선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방문객’으로서 출입을 허락해줄 때까지 매일 도서관에 찾아갔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서관 문이 열렸습니다.

하루 한 권만 열람 가능하다는 조건부였기 때문에 도서관 운영시간 동안,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커피로 끼니를 떼우며 꼼짝 않고 의궤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또한 의궤 연구를 하면서 동시에 한국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며 의궤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렸는데 ‘의궤 반환 운동’을 촉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91년 서울대학교가 정부에 외규장각 의궤 297점 반환 추진을 요청하여 정부와 프랑스가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참 후인 1993년 한국과 프랑스 대통령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현목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책을 전달하면서 반환 의지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후 협상이 연기되거나 반환 방식에 대해 견해 차이를 보이는 등 반환 협상이 난항을 겪자, 국내의 학계와 시민 단체가 주축이 되어 정부와 협력하여 반환 운동을 했습니다.

의궤 297점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는 20년의 시간이 더 걸려, 비로소 2011년 4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4차에 걸쳐 145년만에 고국으로 귀환되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의궤의 반환 방식이 ‘영구 대여’인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완전히 우리 소유’가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숙제를 남기며 2011년 11월 23일 88세의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떼제베’를 팔기 위한 프랑스의 정치적 반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물과 커피로 허기를 때우기가 일상이었으며 결혼도 포기하고 한국에서의 교수직 제의도 거절하며 반평생 의궤 연구에만 몰두한 故박병선 박사의 고귀한 업적이기도 합니다.

직장암 수술 후에도 ‘이렇게 살 수 있는 날은 덤’ 이라며 마지막까지 의궤 약탈의 계기가 된 병인양요 연구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의궤 반환을 ‘천명’ 이라 여기고 푼돈에 가까운 ‘연금’으로 생활하며 36년의 시간을 희생한 박병선 박사님의 ‘고귀한 값’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의궤를 소개하는 DB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2022년 11월 1일부터 시작된 전시는 2023년 3월 19일 까지 상설전시관에서 관람할 수 있으며 11월 27일 일요일 까지는 ‘박병선 박사님’ 추모 11주기를 기리기 위한 무료 관람 기간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DB 열람 바로가기 ]

[ 故박병선 박사 이야기 KSB 다큐 영상 바로가기 ]

이후의 기간 부터는 성인 5000원 요금으로 인터파크 및 현장에서 예매 가능합니다.

매주 수요일은 ‘큐레이터와의 대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며, 12월 5일(월)은 국가 중요 행사로 인해 전시 운영하지 않습니다.

또한 강화도에는 2002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에 찾아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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